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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

예배의 형식과 삶의 사이, 그 어디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거울을 보고 그 거울 안에서 자신을 보신다. (…) 당신은 누구인가? 본래 당신은 전능자의 거울이 되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당신은 전능자의 거울이다. 당신이 창조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다.” — A. W. 토저
예배하는 우리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보일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예배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을 할애하는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12:1-2절 말씀처럼 우리의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된다는 것은 나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우리의 고백 속에는 우리와 교회의 모습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겠다는 결심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반역했던 우리로 하여금 예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주권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되면 예배 가운데, 삶 가운데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서 우리가 예배자가 된다면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주인 되려는 사람이 없이 하나님이 주인이시니, 얼마나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질 수 있을까요?
예배가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라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삶의 시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로마서 12장에 언급된 ‘너희 삶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식과 삶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과 일상의 삶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살아가면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는지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영광과 존귀를 받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삶이 그 창조의 목적에 맞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안식>은 매주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안식일은 노동의 존엄성을 신성하게 고양시킨다. ‘너희는 일곱째 날에 노동을 삼가라!’는 명령은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라!’라는 명령의 속편이다.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행하라. 그러나 일곱째 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가장 큰 이유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엿새를 열심히 살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가는 안식일 이전의 날들에 좌우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고 엿새를 살면 예배가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예배의 감격이 사라졌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예배자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초대교회의 예배는 매우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고, 일상의 6일 동안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 또한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배당에 나와 형제와 자매들을 보면 너무 감격스러원 포옹하고 간증을 하는 바람에 예배가 시끄러웠습니다. 소음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을 치열하게 살았던 믿음의 고백으로 교회가 시끌시끌했던 것입니다.
예배 분위기가 조용하면 말씀 전하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 전하기 좋은 고요함이 예배일까요, 아니면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았던 성도들이 찬양하며 눈물 흘리고, 감사와 감격의 간증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것이 예배일까요? 일주일을 열심히 살아갈 때 오늘 우리가 함께 모이는 공간과 시간은 우리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공간과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로 인해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고, 삶의 예배를 통해 더욱 하나님이 나타내지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고자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이것이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