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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

교회력 이야기: 부활의 영성

너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현대인의 삶 속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에 느림의 미학을 부여합니다. 이 느림의 미학을 좀 더 더 확대하기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작가 켄 가이어는 ‘속도를 늦춰주소서’라는 제목으로 기도합니다.
지나온 길에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었던 사랑도 기억되게 하소서. 이 여정이 얼마나 짧은지 깨닫게 하사 아무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속도를 늦춰주소서.
시간의 종교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라기보다는 시간의 종교입니다. 먼저, 이 말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간이라는 역사적인 한계 속에서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그 사건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또 하나는 교회력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예배를 반복적으로 구조하여 축하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력을 종합해서 정리해서 말한다면, 교회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되어진 우리의 구원 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의 개신교회가 공통으로 지키고 있는 연중 교회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림절(Advent) 성 안드레 기념일인 11월 30일이나 이 날에 가장 가까운 주일부터 시작되며 성탄절 이브까지 4주간 계속된다.
성탄절(Christmas) 12월 25일부터 시작하여 1월 5일까지 계속되는 12일간의 절기이다.
주현절(Epiphay) 1월 6일
예수님 수세 주일(Baptism of the Lord) 주현일 후 첫 번째 주일
산상변모주일(Transfiguration) 사순절이 시작되는 참회의 수요일 이전의 주일
사순절(Lent) 참회의 수요일부터 시작되어 부활절 전 토요일까지 40일간의 절기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주일은 포함되지 않으므로 실제로는 46일간의 기간이 된다.
부활절(Easter) “봄의 첫날(춘분) 이후에 오는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이며 그 만월이 주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로부터 50일간의 기쁨의 절기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주일(Day of Pentecost) 부활주일 후 50일째 되는 날 
삼위일체주일(Trinity Sunday)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Christ the King Day) 대림절 바로 전 주일
비절기 기간(Season after Pentecost/Ordinary Time) (1) 주현일(1월 6일)후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 참회의 수요일 전까지의 기간 (2) 성령강림주일 후부터 대림절 전까지의 기간
기독교는 이런 교회력을 사용해서 기독교 예배 가운데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현재에 만나게 되는 아남네시스의 경험과 미래의 하나님의 행동을 현재로 가져오게 하는 프로렙시스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다. 이런 두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력을 은총의 교회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부활절의 명칭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 Easter는 'Eastre'라는 이교도적인 이름을 고대 영어에 맞추어 바꾼 말입니다. Eastre는 튜튼 족의 신 중 봄과 새벽 여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여신의 축일은 해마다 춘분에 열렸습니다.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히브리어인 파스카(Pascha)였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에게 새로운 유월절, 즉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뜻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는 Easter라는 단어보다 파스카(Pascha)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부활절의 역사와 중요성
부활절은 기독교 축일 중 가장 오래 된 절기이며 교회력에 다른 축일의 근원이 됩니다. 한 주간의 첫 날에 예수님이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매 주간의 첫 날은 기독교의 부활의 사실이 확인되고, 이 날에 이어진 희망과 승리의 사실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주의 첫날은 주님의 날로 확정되고, 이 날은 작은 부활절로서 축하 되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부활이 매주간 첫 날에 지켜졌기 때문에 예배일이 안식일(토요일)에서 주님의 날(일요일)로 바뀌어 주일이라는 이름아래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절이 항상 경축일 중의 가장 큰 경축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습니다. 부활의 우위성은 매주 부활이 축하 되어진다는 사실로써 잘 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교회력의 각 주일이 경축의 잔치로 간주됩니다. 부활절의 중요성은 그것에 앞서 40일간의 사순절이라는 준비 기간이 있다는 사실과 부활절이 50일간의 절기로서 지켜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부활 주일 날짜 문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계속적인 논쟁을 하다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봄의 첫날(춘분)인 3월 21일 후에 오는 만월 후 첫 주일에, 또는 그 만월이 주일인 경우는 그 다음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 결의는 봄의 첫날이 주일인 경우는 그 다음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 결의는 봄의 첫날을 기준으로 세움으로써 부활절이 유월절에 온다는 동방교회 쪽의 주장과 주일이라는 날짜를 확정함으로써 서방교회의 주장을 절충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해마다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의 신학적 의미
(1) 교회의 신앙을 위한 본질적인 기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주님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은 십자가 사건의 연장선 속에 있으며 십자가 사건을 완성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2)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선취이자 성도들의 현재 삶을 위한 모범 부활절은 삶과 죽음을 포함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의 패러다임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날로서 그 모든 경험이 성취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미래의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부활을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역사 위의 한 인간이신 예수님에게 선취적으로 일어남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그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일어남의 시작이요 기초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모든 종류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경험의 모델이 됩니다.
(3) 공동체를 세우는 경험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가 되었고, 이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는 개인속에 부활의 경험을 확장해 가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사도행전의 선교 속에서 드러납니다.
기쁨의 50일
부활주일부터 50일간 계속되는 부활 절기는 ‘기쁨의 50일’(The Great Fifty Days)로 불리며 부활주일과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을 연결하는 교회의 절기입니다. 이 기쁨의 50일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고대 문헌들은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3세기 초 터툴리안이 ‘파스카 시기’의 50일간을 ‘오순절’(Pentecost)이라는 단어와 동일시하여 사용한 것을 보면 이 단어가 50일째 되는 하루를 의미하는 용례와 달랐음이 확인됩니다. 그는 특별히 이 기간 동안을 특징지었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된 종말론적 소망과 교회에 대하여 성령을 부어주심, 그리고 하나님에게 모여든 거듭난 백성들의 언약 등으로 생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50일간의 ‘파스카 절기’ 동안에는 금식하거나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의 개신교회 내에서는 아직도 이 절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무하여 7주 동안 계속되는 이 기쁨의 부활 절기 동안에 어떤 설교자들은 고난과 환란에 대해서 설교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부활절을 하루의 잔치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부활의 영성
니키 크루즈라는 사람은 ‘내 인생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변화를 놓고서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만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인생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도망치는 데 지쳤습니다. 내 인생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변화시켜주십시오. 제발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이런 변화의 멋진 실마리를 보여 주는 그림이 있다면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의 저녁 식사라는 그림입니다.
Rembrandt, Supper at Emmaus, 1628
이 그림에서 얼굴이 보이는 유일한 인물은 화면 가운데 있는 한명의 제자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듯한 밝은 빛이 반사되어 제자의 얼굴은 비추어집니다. 예수님은 신비로운 빛의 출처이지만 그 빛은 벽쪽을 향하고 있어 예수님의 실루엣만 돋보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뒤에서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여인 역시 밝은 불빛을 몸으로 막고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식탁 아래 어둠 속에 의자를 밀쳐 내고 경배하듯 예수님 앞에 몸을 완전히 구부린 제자가 어둠속에 있습니다. 어둠속에 있는 이 제자와 빛을 받는 제자의 모습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예수님을 본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채고는 매우 놀라 어쩔 줄을 모릅니다. 오른팔은 놀라움을, 자신을 보호하려는듯 몸 안쪽 가까이 가져간 왼손은 불안함을 표현합니다. 또한 머리 위에 위태하게 걸려 있는 가방 역시 그의 불편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반면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는 자는 어둠 속 예수님의 실루엣만을 앞에 두고도 깊은 신심을 드러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는 실제적으로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만을 붙잡는 것에만 있지 않고, 실제로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부활의 영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때 변화는 자연스러운 하늘의 역사로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올해 부활절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이제는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 두루 퍼진 부활절 인사말을 함으로써 우리 속에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기대하면 좋겠습니다. 
Christos anestos! (Christ is risen: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 Alethos anestos! (He is risen indeed: 정말로 그가 살아나셨습니다!)
참고자료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로버트 웨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Alister E. Magrath, “Christian Spirituality” 김학철, “램르란트 성서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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